박찬일 셰프의 백년식당 이야기…서울의 '대표적 노포' 청진옥·열차집

입력 2015-11-23 07:00  

● 청진옥
"喪中에도 솥 불 끄지마라" 부친 유언
3代째 이은 국내 '해장국집의 대명사'

●열차집
오직 빈대떡과 막걸리만으로 유명세
장안의 연예인·정치인들도 드나들어




‘대를 물려 내려온 오래된 점포’라는 뜻을 담고 있는 노포(老鋪)에는 오랜 세월을 버티고 맛을 지켜온 고집스러움과 함께 갑남을녀(甲男乙女)의 아련한 기억들이 담겨 있다.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노포가 드물다. 노포가 많이 생기려면 사회가 안정돼야 하는데 우리 근·현대사는 격변의 연속이었다. 최근 노포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노포는 단지 오래된 가게를 넘어 하나의 역사며 문화다. 서울의 대표적인 노포인 청진옥과 열차집을 찾은 것은 오래된 추억 속으로 여행을 하고 싶은 소망 때문일 것이다.

토렴해서 만들어주는 정통 해장국집 ‘청진옥’

“원래 청진옥이 있던 자리에 올 때마다 고통스러워요. 오래된 가게들을 허물고 새롭게 증축한 멋없는 건물을 보는 일도 괴롭고요.”

청진옥의 주인인 최준용 씨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청진동 89다. 나고 자란 곳이 재개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을 겪었다. 수몰민에 버금가는 트라우마다. 그래도 오늘도 해장국은 끓는다. 청진옥.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문을 열었다. 당시 경성은 호황이었다. 일본은 연전연승했고, 식민지 수도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원래 조선사람은 소고기를 좋아했다. 왕이 수없이 소 도살 금지령을 내렸지만 무시되기 일쑤였다. 소고기의 남은 뼈로 탕을 끓여 먹은 것 중 하나는 설렁탕, 또 하나는 바로 해장국이다. 이 두 음식은 전형적인 서울 음식이다. 해장국의 옛 이름은 해정국이다. 해정갱(解羹)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시대에 유행했다. ‘술 깨는 국’이란 뜻이다.

청진옥은 최동선·이간난 부부가 창업했다. 그후 아들 최창익·김재인 부부에게 이어졌고, 지금은 창업주의 손자인 최씨에게 솥을 관리할 책임이 넘어갔다. 최씨의 부친 최창익 옹은 2005년에 작고했다. 최씨는 회사를 다니다가 청진옥을 물려 받았는데 가게 경영을 맡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부친이 대를 물릴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친 작고 전 투병 중에 자연스레 가게에 나왔고, 얼떨결에 눌러앉게 됐다.

옛날 해장국은 지금과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밥은 자기 집에서 가져오는 게 보통이었다고 한다.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이므로 뜨거운 밥을 제공하기 어려웠고, 토렴이라는 기술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국이 끓는 가마솥에 찬 밥을 여러 번 데우며 국물도 밥도 따뜻하게 하는 기술이다. 요즘은 뚝배기를 직화로 끓여 내오는 방식이 흔한데 과거에는 볼 수 없는 방식이다.

토렴한 해장국은 다 이유가 있다. 국의 온도가 적당해 빨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장국은 전형적인 노동자 음식이다. 그러니 너무 뜨거우면 안된다.

청진옥은 서울의 역사를 기억하는 집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 현장에 청진옥이 얽혀 있다. 서울 사람들은 청진옥에서 속을 풀며 그 역사를 살아 왔다. 상중에도 솥의 불을 끄지 말라고 했던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실제로 최씨는 영업을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단순한 음식을 넘어, 청진옥 해장국이 갖는 역사적 무게가 느껴진다.


오직 빈대떡과 막걸리로 시대를 풍미한 ‘열차집’

광화문통에 있는 열차집을 기억하는 술꾼들이 아직도 건재하다. 기다란 모양의 가게 구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골목집이나 이모집, 두 번째집 같은 옥호는 바로 손님이 붙이는 법인데 이는 그만큼 단골이 많고 인기 있는 집이란 뜻이다. 열차집이 바로 그랬다. 오직 빈대떡 한 장과 막걸리 한 잔으로 시대를 풍미한 역사가 있다.

열차집도 피맛골 재개발과 함께 장소를 옮겼다. 공평동 언저리다. 주인 윤해순 씨는 지금도 아내 우제은 씨와 함께 가게에 자주 나온다. 아들 상건 씨(47)에게 대부분의 운영 일을 맡겼지만 열차집에 바친 일생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열차집은 한때 강북 도심의 최고 인기 술집이었다. 낮부터 사람들이 있었다. 열차집은 수많은 장안의 명물들과 연예인, 정치인들이 드나들었다. 소박한 집이지만 명성은 드높았다. 자리에 앉아 빈대떡을 시켜본다. 시간여행이 따로 없다. 옮긴 자리지만 마치 100년된 집처럼 길이 들어 있고 편안하다.

원래 열차집은 광화문 교보문고 자리에 의사회관이 있을 때 생겼다. 복개천이 있었고, 그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빈대떡집이었다. 1950년대 초 처음 생겨 현재 주인에게 인수된 것이 1977년이다. 그때부터 계산해도 40년 노포다. 열차집에 가면 벽에 지금의 주인 상건씨가 어린 시절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 초기 열차집 시절의 사진이다.

옛 언론인 ‘자유신문’ 1948년 12월16일자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빈대떡이라는 이름의 수필로 글쓴이는 유영륜이며, 그는 자그마한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늘 빈대떡에 술 먹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내 단골집인 빈대떡집으로 찾아간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이 집을 극성으로 찾아간다. 젊은 여인네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구수우한’ 빈대떡에 약주 맛이 유달리 기막히다. … 해방 후에 급속도로 보급된 것이 빈대떡인데 하여간 빈대떡이 없으면 내가 망하고 내가 없으면 빈대떡이 망할 것이다.”

글로 미뤄 몇 가지 유추되는 정보가 있다. 1950년에 열차집이 열렸다는 건 이미 그 시절 서울 장안의 인기 메뉴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수필 속에 나오는 을지로 입구에도 있고 ‘해방 후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도심을 중심으로 많은 가게가 있었을 것이다.

공평동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단골들은 여전히 찾아온다. 세상이 변해 다 얄팍해지지만 열차집은 옛 맛을 지켜내고 있다. 여전히 돼지기름을 쓰고 있으며 좋은 녹두를 포기하지 않는다. 구수하며 진하고 겉은 바삭하?속은 촉촉한 진짜 빈대떡 말이다. 열차집은 저녁에 찾아도 좋지만 낮술이 제격이다. 막걸리를 털어 넣으며 그렇게 서울의 한 오후를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울을 산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박찬일 셰프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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